<김창완의 이 노래 : ‘산할아버지’>
피프티피프티 사태가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이 사태를 둘러싼 핵심원인은 단연 돈입니다. 노래가 뜨자 막대한 돈이 보였고, 극한상황을 불렀습니다. 노래가 뜨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파국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잘잘못은 향후에 법정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대목이 있습니다. 대중가요가 점점 돈에 광적으로 집착한다는 점입니다. 대형기획사는 ‘뜰 만한’ 아이돌을 모아서 ‘뜰 만한’ 노래만을 만들어 거기에 적합한 ‘뜰 만한’ 의상과 안무를 접합시키는 것이 일종의 공식이 되었습니다. 대중가요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드라마, 영화, 노래 등 대중예술은 전부 그렇습니다. 물론 헐리우드라도 하여 다른 것은 아닙니다.
대중예술이 갈수록 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은 전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오죽하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가장 많이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예술영화의 사장을 걱정할 정도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넷플릭스 등 OTT의 가세로 상업성이 미약한 순수예술장르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1980년초에 만든 ‘TV문학관’을 보면 수채화같은 영상미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드라마나 영화는 못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1980년대에도 대부분의 대중가수는 동요는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방송국은 거대자본을 등에 업고 대중예술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혈혈단신 가수가 동요를 부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김창완과 그 형제들이 만든 록그룹 ‘산울림’의 동요 ‘산할아버지’가 시대를 초월하여 갈채를 받는 것입니다. 동요를 순수예술이라고 보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안 되는’ 장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대중가수란 대중가요, 즉 대중의 취향에 맞는 노래인 ‘돈이 되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입니다. 당연히 동요를 것은 쉽지 않습니다. 팝스타 중에서도 크리스마스 캐롤이라면 모를까 동요를 선뜻 불렀던 가수는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QnvZRnWPps
김창완은 한국 가요계에서 개성이라면 단연 으뜸인 가수입니다. 가수의 본분인 화려한 의상과 치장과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평범함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나 그 평범함 속에서 그 어느 가수도 시도하지 못한 개성이 넘치는 노래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과문한 탓인지 김창완의 노래 중에서 표절시비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 이전에 ‘산할아버지’나 ‘어머니와 고등어’ 같은 노래는 그 어느 가수도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곡이기도 합니다.
‘산할아버지’는 발표 이후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아이는 물론 어른까지 흥얼거리면서 따라불렀습니다. 실은 당시 트로트가 대세인 시절에 어른까지 이 동요를 따라부른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임에도 김창완은 그 엄청난 일을 해냈습니다. ‘산할아버지’의 가사나 리듬 자체는 무척이나 단순합니다. 그러나 단순하다고 하여 저질이라는 공식은 어렵습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는 엄청나게 단순한 리듬임에도 명곡 중의 명곡으로 꼽히는 점을 반추해봐야 합니다.
산할아버지 구름모자 썼네
나비같이 훨훨 날아서
살금살금 다가가서
구름모자 벗겨 오지
산할아버지가 쓴 구름모자를 살금살금 다가가서 벗긴다는 아이들의 장난이 딱 떠오르는 가사에는 아이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순수함이 묻어있습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이 있습니다. 그 어린 시절은 세파에 찌들어서 잠시나마 잊을 수는 있어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입니다. ‘산할아버지’를 따라부르는 사람은 저절로 아이가 됩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나마 돈 걱정도 잊고, 인간사의 복잡함도 잊게 되고, 인생의 신산도 잊게 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산할아버지’는 누구라도 세월을 거스르게 만드는 신통방통한 묘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