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의 이 노래 : ‘행복을 주는 사람’>
러셀 크로가 열연한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극중 막시무스 장군에게 황제의 권좌를 물려주려는 풍채 좋은 로마의 황제를 기억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조연으로 극중 비중 자체는 높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줄거리의 출발점이 된 배역입니다. 그가 바로 ‘명상록’이라는 베스트셀러 수필을 지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로마의 현자이자 황제입니다. 평생을 현실의 권력투쟁과 전장 속을 누빈 용장이면서도 금욕생활을 추구한 이채로운 인물이기도 했기에, 명상록이라는 걸작 수필을 지었습니다.
부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인물이 홀로 명상을 하는 순간을 행복이라 느꼈다는 역설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천년이 넘는 로마사를 보면 사치와 향락이 어쩌면 로마황제의 기본인데, 이례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의 사후 합스부르크 왕가, 부르봉 왕가, 그리고 로마노프 왕가 등 유럽을 대표하는 왕가는 대부분 사치의 본산이었기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토아학파에 입각한 금욕생활은 아직도 후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의 인물들 : 인류역사상 손꼽히는 부를 축적하고도 청빈한 부를 축적했다고 자평하는 록펠러, 그리고 애플제국을 이룬 것에 비하면 소박한 옷차림으로 일관한 스티브 잡스, 그리고 햄버거 등 서민음식을 즐겨 먹는 주식투자의 살아있는 전설 오마하의 현인(Oracle of Omaha) 워렌 버핏 등의 인물의 전형이 바로 그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유형의 인물은 극히 이례적인 인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돈에서 행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는 주로 주조연이나 조연 배역으로 일관하는 사무엘 잭슨은 돈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바로 그 해답을 했습니다. : ‘돈이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돈이 별로 없다.’ 사람은 물적 토대에서 생존이 가능하기에 돈을 추구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래서 ‘정당하게 돈을 많이 버는 것이야말로 신의 소명을 확인하는 작업’이라는 칼뱅의 가르침도 있습니다. 정당하게 돈을 버는 작업은 신이 나고 재미있으며, 신의 소명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정을 지으면 뭔가 공허합니다.
내가 돈을 번다고 하여 타인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을 달나라나 우주에서 버는 것이 아니라 공존의 공간인 사회에서 버는 것이기 때문에 돈을 버는 작업이 당연히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는 작업이라는 결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사랑이라는 변수가 등장하면 행복이라는 함수는 또다른 해답을 갖게 됩니다. 2021년부터 우리사회는 젠더갈등을 극심하게 겪게 됩니다. 듣기에도 민망한 ‘설거지론’, ‘마통론’ 등 남초커뮤니티에서 제기된 반발이 바로 그것입니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쟁취를 위한 투쟁에서 패한 루저남들의 푸념이 크기는 하지만, 그 발상의 원인이 돈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주로 여초커뮤니티에서 주장하는 모든 도태남-결혼하지 못한 남자-이 돈이 없는 남자는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도태남이 확률이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도태남이라는 시각은 여자가 남자를 간택해서 결혼한다는 발상을 전제로 하는데, 지구촌에서는 이미 비혼이 대략 절반인 추세입니다. 그런데 결혼이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이혼의 비율이 절반에 근접하는 나라가 존재하는 등 그 비율이 급증하는 것이 현실이기에, 과연 결혼이 행복의 징표인지 의문이 있습니다. 불행하려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하려고 돈을 적당히 버는 배우자를 택했음에도 행복하지 않아서 이혼을 합니다. 그럼 이혼한 사람은 행복한가, 하면 이혼자의 삶을 추적해 보면, 그렇지는 않아 보입니다.
시대가 변해서 이제는 결혼 자체가 개인의 선택인 시대라 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든 안하든, 사랑이란 사람이 느끼는 극한의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적당히 돈을 갖고 있으면서 사랑하는 상태라면 결혼유무에 관계없이 행복한 상태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상대도 사랑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불쾌감을 주거나 모욕감을 안길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조변석개하는 것이 사랑이며, 상대방의 사랑의 강도와 내 사랑의 강도 자체가 일치하기 어려운 주관적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애작업은 엄청나게 고난의 길이기 마련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T4zkewkyfA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우리 가는 길에 아침햇살 비치면
행복하다고 말해 주겠네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해바라기의 ‘행복을 주는 사람’의 가사입니다. 그 험난한 길을 같이 가는 사람이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도 엄청나게 어려운 일인데,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극악의 난이도입니다. 대중가요의 가사이기에 그냥 넘어가지만, 현실에서는 찾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돈이 없으면 행복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것은 만인이 공감합니다. 그렇다면 돈이 아니라도 그에 버금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주면서 험난한 길을 함께 하는 사람이란 부모 정도가 아니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해바라기를 좋아했고, 바로 이 노래를 좋아해서 노래방에서 무척이나 많이 부른 노래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나는 누구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인가, 아니면 누가 나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인가, 라는 인간철학 속의 딜레마를 부르는 자문에는 언제나 회의적이었던 자답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