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는 지금과 달리 매주 월요일에 ‘애국조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줄을 맞춰서 ‘열중 쉬어!’ 자세를 취하면서 선생님들이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교장선생님 이하 선생님들의 ‘말씀’을 경청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거의 잊혀진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해야 했으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통해서 애국심을 고취시켜야 했고, 물자절약과 국산품애용, 그리고 수출증대의 실적을 통한 민족중흥의 감흥을 강제로 전달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면 양반입니다. 흰머리가 하얀 교장 선생님의 훈화로 일제시대의 교훈과 6.25시절의 공산군의 만행을 ‘지도’받아야 했습니다. 보릿고개시절에 비하면 너희들은 무척이나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초근목피로 연명을 해야 했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배고파서 힘이 들었다는 고생담을 강제로 들어야 했습니다.
육자배기도 한 두 번입니다. 일 년 내내 똑같은 훈화에 짜증이 물밀 듯 들어옵니다. 그 당시에 어려웠다고 지금도 당연히 어려워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에 어려웠다는 사정이 벼슬도 아님에도, 무엇보다도 꼼짝도 못하고 교장선생님의 가르침을 들어야 하는 것은 사실상 체벌과 마찬가지임에도,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하자면’으로 안심(!)을 시키는 듯 하다가 다시 10여분 동안 인생의 교훈을 장황하게 설명하시는 교장선생님이 무척이나 미웠습니다.
당시에는 어른의 말씀은 무조건 새겨들어야 한다는 괴상한 교훈을 어른들로부터 들어왔기에 감히 반발도 못했지만,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어린 학생들이 쓰러지는 상황이 속출했음에도 교장선생님의 훈화는 도무지 그치지 않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과거 교장선생님 세대의 고생을 들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저를 포함한 세대들이 얼마나 인생에 보탬이 되고 뼈와 살이 되었는지 그저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실은 애국조회시간이 무척이나 지루하고 짜증이 났던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소통’이라는 것을 통하여 자신들이 싫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각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과거 담임선생님에게 매질을 당해도 아무런 말도 못했던 시절은 그야말로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도, 매질을 하는 담임 포함 선생님들을 즉각 고소하는 풍토가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추억의 보정효과로 과거의 일은 마냥 좋게 기억이 되는 효과가 있지만, 과거 끔찍했던 교장선생님의 훈화시간은 영영 좋은 추억으로 자리잡지는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