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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봉의 이 노래 : ‘그때 그 사람’>7080 가수/7080 여자가수 2024. 12. 25. 04:29728x90반응형
심수봉은 비운의 가수입니다. 트로트곡이면서도 재즈풍이 묻어있는, 노래 자체로도 완성도가 뛰어난, 퓨전곡 ‘그때 그 사람’을 무려 자작곡으로 1978년 대학가요제에 출품했으면서도 입상조차 못한 비운의 가수입니다. 게다가 당시 무수히 범람하던 각종 가요제의 출품곡의 저작권자와 마찬가지로, 히트곡은 남겼지만 저작권료는 챙기지 못한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당시 공중파방송국은 출전자의 입상, 그리고 가요계의 데뷔를 미끼로 출전자가 발표한 곡의 저작권을 통째로 꿀꺽했습니다. 그나마 입상자는 상금이라도 챙기고 쇼프로그램에 출연이라도 했건만, 미입상자 심수봉은 한푼도 챙기지 못했습니다. 미입상의 이유가 ‘그때 그 사람’이 아마추어답지 않게 완성도가 뛰어났다는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블랙코미디입니다.
그때 그 시절 그 엄청난 수의 가요제 중에서 단연 넘버원은 ‘MBC 대학가요제’였습니다. 인기를 반영해서 골든타임에 생중계로 방영되었습니다. 당시 최고 인기MC 이수만이 사회를 보는 것 자체로도 ‘MBC 대학가요제’의 위상을 설명합니다. 위상, 그리고 인기는 돈과 직결됩니다. 유명 작곡가에게 제작진이 부탁을 해서 입상곡을 작곡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방영이 끝나자마자 대학가요제 앨범이 나오고 불티나게 팔렸던 사실은 대학가요제 제작진과 음반관계자 간의 ‘검은 유착’을 의심할 정황입니다. 당시에는 정식음반은 물론이고 해적판으로 불리는 불법음반(리어카에서 팔린다고 하여 ‘리어카앨범’이라고도 불렸습니다)도 엄청나게 팔렸습니다, 가요순위 프로그램에서도 노골적으로 밀어줬습니다. 방송국과 음반사가 떼돈을 벌었다는 소문은 당시에도 뜨거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qtRO_Pmyxg
미입상의 설움은 입소문으로 퍼진 인기로 만회가 되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그때 그 사람’은 들불처럼 전국에 퍼졌습니다. 대학가요제 역사상 미입상곡이 입상곡보다 인기를 누린 것은 ‘그때 그 사람’이 거의 유일한 예외입니다. 마침내 그 인기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미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궁정동 안가에 불려가서 노래를 불렀고, 비극의 현장을 목격한 가수가 되었습니다. 궁정동에 불려간 것은 그의 인기를 방증하는 것입니다. 잠시나마 행운의 가수로 전환되는가 싶더니만, 그 현장은 비극의 현장이었습니다. 10.26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강제로 무대에서 오랜 기간 사라져서 잠행의 시간을 강제받았습니다. 망각의 시간, 그리고 시련의 시간이었습니다.
희극은 비극으로, 그리고 비극은 희극으로 전환되기 마련인 것이 인생의 법칙입니다. 궁정동의 비극은 한편으로는 박정희시대의 아이콘으로 등극하는 전기가 되었고, 잊혀져 가는 가수에서 생환한 가수라는 희극으로 인생 대반전을 썼습니다. 좋든 싫든 ‘그때 그 사람’은 심수봉을 떠올리는 상징적인 노래이고, 다시 심수봉은 박정희를 소환하는 연쇄연상효과를 낳았고, 이러한 일련의 아이러니한 상황은 심수봉의 인기가 장수만세(?)하는 상황으로 흘러갔습니다. 절대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절대권력자이기에 유명가수를 마음대로 저녁에 부를 수 있다는 부패권력이 지배하는 불합리의 시대를 증명하는 생체증거가 바로 심수봉이었습니다. 가수라면 노래로 세인의 평가를 받아야 함에도, ‘자연인’ 심수봉 자체가 시대를 묘사하는 상징물로 평가를 받는 비운의 가수였습니다. 당연히 ‘그때 그 사람’의 가치가 빛을 잃었습니다.
다 같이 배고프던 그때 그 시절에 피아노를 능수능란하게 칠 수 있었던 여성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아파트시대인 지금은 천덕꾸러기로 취급을 받는 피아노지만, 그때 그 시절의 피아노는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여자에게 작곡이란 ‘여자가 감히!’라는 머나먼 모험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학가요제에서도 기타나 하모니카 반주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능숙한 피아노연주를 반주로 연출하는 광경은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연주, 반주, 그리고 작곡은 물론 작사까지 훌륭해서 심사위원들을 경악하게 만든 가수가 심수봉이었습니다. 프로냄새가 물씬 날 정도로 훌륭해서 입상을 못했다는 아이러니를 당시 어린 대학생 심수봉이 만들었습니다.
천재에게 노력이 중요하다는 발명왕 에디슨의 말은 일부만 맞습니다. 적어도 예체능의 영역에서는 재능이 월등하게 중요합니다. 심수봉의 사례를 보더라도 재능의 영역이 우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대중예술가에게는 왕성한 창작의 불꽃이 피어나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지기 마련입니다. 시련의 시기가 없었다면 더욱 훌륭한 곡으로 동 시대는 물론 후대에게도 아름다운 선율과 즐거움을 안겨주었을 텐데, 아쉬움이 가득한 가수가 심수봉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제 ‘그때 그 사람’은 노래 자체만으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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