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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승룡과 라디오시대>
    7080 이야기거리 2023. 5. 5.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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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학 분야에서 가장 어려운 분야로 꼽히는 것이 경기예측론입니다. 향후 발생할 일을 정확하게 예측한다는 것은 사실은 신의 영역에서나 가능하기에, 과연 학문으로 성립하냐는 의구심마저 있습니다. 그래서 경기예측론은, 특히 경제성장률은, 변수의 통제를 전제로 합니다. 경기예측론 자체가 이러한 조건이 유지된다면 이러할 것이라는 가정적 결과입니다. 과학적 결과를 도출한다고는 하지만, 방법론은 근원적으로 비과학적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예측불가의 사유가 존재합니다. 그 누구나 9.11을 예측했을 것이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예측했을까요? 실은 경제학 자체도 이런 미래에 대한 불가측성 때문에 ‘ceteris paribus(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라는 변수의 통제를 전제로 성립이 됩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가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힐러리가 당선될 것을 예측했지만, 트럼프가 당선되듯이, 세상은 언제나 돌발변수가 있습니다. 실은 개인사에서도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플랜B를 철저히 준비하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100년 전에 영화와 라디오만이 세상이 존재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TV의 발명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막상 TV가 보편화되었을 무렵에는 영화와 라디오는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노래, ‘Video kills radio star’라는 팝송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TV의 보급이 보편화되었어도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영상미의 쾌감으로 영화관은 오히려 승승장구했습니다. 멀티플렉스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리고 라디오는 TV와는 별개의 수단으로 자동차를 파고들면서 대중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유튜브의 등장은 라디오와 유튜브의 화학적 결합을 가능하게 하여 라디오를 더욱 발달시켰습니다. 세상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라디오시대의 엔터테인먼트 기능의 상당수가 TV나 영화로 이동한 것 자체는 인정하여야 합니다.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사람들에게 친숙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영향력이나 위력은 TV가 몇 수 위입니다.

     

    과거 1970년대 공중파TV는 지금과 같은 종일방송이 아니었습니다. 주말은 오전부터 방송을 볼 수 있었으나, 평일은 저녁이 되어야 비로소 공중파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공중파TV는 언제나 각 가정의 아버지나 어머니들이 채널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부득이 라디오(주로 FM)를 들으면서 팝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TV가 없는 가정에서는 여전히 라디오가 친구이자 동반자, 그리고 재롱둥이였습니다. 그 시절 라디오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사람이 바로 오승룡이었습니다. 그는 수십년간 라디오시대를 풍미한 역사의 증인이자 라디오시대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는 라디오에서 거의 전 분야에서 뛰었습니다. 음악DJ도 했고, 라디오드라마의 출연배우, 즉 성우도 했으며, 시사퀴즈의 진행자나 각종 오락프로그램의 MC로도 맹활약을 했고, 라디오 드라마는 물론 다큐멘타리의 나레이션도 했습니다. 심지어 시사토론의 해설도 했습니다. 그 유명했던 오발탄의 진행자가 바로 오승룡이었습니다. TV시대가 본격화되자 그는 배우로서도 맹활약을 했습니다. 비록 주연급은 아니었지만, 사극이면 사극, 시대극이면 시대극, 단막극이나 연속극 등 장르도 가리지 않았습니다. 팔방미인이라는 말이 딱 오승룡에게 해당되는 말이었습니다. 정식 가수활동은 안했지만, 어쩌다 부르는 노래도 수준급이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TV시대가 정착이 되자 고령이라는 한계 때문에, 본격적인 배우활동은 어려웠습니다. 대신 다시 라디오로 뛰어들어서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그의 목소리를 듣기 어려워졌습니다. 2022년에 포털의 한구석에서 그의 부음을 알리는 기사가 떴습니다. 활동량만으로 비교하면 그는 송해보다 더 왕성하게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전 국민이 애정하는 전국노래자랑의 임팩트를 도저히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해에 작고했음에도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만을 한정하면 단연 오승룡이 한 수 위의 인기도를 지녔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실은 그 시절까지 송해는 코미디언으로서는 정상급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전국노래자랑의 위력은 한편으로는 TV의 라디오에 대한 막강한 위력을 웅변으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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