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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년 추억의 청룡기 고교야구 결승 : (feat, 박노준) >
    7080 이야기거리 2024. 5. 5.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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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히 43년 전 경기임에도 엊그제 일처럼 기억이 나는 경기를 우연히 유튜브에서 찾았습니다. 바로 1981년 청룡기 고교야구 결승전 경북고와 선린상고의 경기입니다. 이 경기를 왜 그렇게나 정확히 기억하냐면 대전 문화동 친구집에서 어렵사리 칼라TV로 봤기 때문입니다. 당시 칼라TV는 부잣집이 아니면 소유할 수 없었는데, 저희 집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기에 당연히 흑백TV가 있었습니다. 칼라TV방송은 전두환 정부가 들어선 1980년에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국민학교 동창이자 바로 옆집에 살던 친구가 기왕이면 칼라TV로 보라고 저를 초대했기에, 담치기(바로 옆집이지만 막상 친구네 집으로 가려면 멀리 돌아가야 했기에, 그냥 담을 넘어서 가곤 했습니다. 요즘같이 아파트가 보편화된 시대와는 많이 다릅니다)를 해서 친구네 집에서 칼라TV를 보는 즐거움에 푹 빠져서 기분좋게 봤습니다. 그 시절은 놀거리가 TV시청이 남녀노소 공통적으로 거의 유일한 시절이라 어제 뭐 봤어!’가 자랑인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인기프로그램 중에서 50%를 넘는 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볼거리, 놀거리가 빈약했다는 방증입니다. 고교야구는 지방에서도 인기였기에, 지금은 철거된 서울운동장(나중에 동대문구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암표상이 서울운동장 주위에서 활약(!)하는 것은 당연지사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A_Pu--ehN8

     

    고교야구의 인기를 반영해서 각종 고교야구대회가 차고 넘쳤습니다. 그래서 서울운동장의 잔디는 황폐되었습니다. 하루에도 서너 차례 경기를 강행했는데, 그 기간이 봄부터 가을까지 이어졌습니다. 잔디는 수난의 계절이었습니다. 관중은 종이모자를 쓰고 출신고교를 응원했습니다. 1980년대까지 야구관중의 상징인 종이모자! 팬들은 어찌어찌 종이모자로 버티는데 정작 선수들은 직사광선 뙤약볕에서 무더위, 그리고 직사광선과 싸웠습니다. 선글라스나 고글을 쓰면 되는데, 아니 검댕이라도 묻히면 좋으련만 이상하게도 그 시절은 그런 것을 하면 건방진 놈이라고 호통을 들어야 했습니다. 선글라스는 글자 그대로 해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안경인데, 왜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는지 참으로 그 시절은 꼰대의 시절이 맞습니다.

     

    박노준은 꾹 닫은 입술과 굳은 표정으로 독일병정이라는 별명으로 당시에도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 인상으로도 당시 여·중고생의 인기몰이를 했습니다. 인기연예인 저리가라였습니다. 박노준은 투타겸업으로 선린상고의 핵심전력이었는데, 지금 보면 직구구속이 130km 내외입니다. 반면 역시 투타겸업을 했던 동료 김건우는 130km 후반입니다. 당시에는 140km이면 강속구투수로 분류했습니다. 투수로 전업했던 1986년에 김건우가 신인으로 18승을 한 것은 당연히 강속구덕분입니다. 강속구투수의 대명사인 선동열의 평균구속도 실은 140km중반이었습니다.

     

    선린상고는 경북고와 전국대회 결승전을 1981년에만 2번을 했습니다. 결승에 오르는 것 자체가 어려운데 2번이나 만난 것은 두 팀의 전력이 강했다는 증거입니다. 선린상고는 모두 졌습니다. 그러나 박노준은 뜨거운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경기 말고 봉황대기 결승에서였는데, 홈으로 쇄도하면서 슬라이딩을 하다가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당시에 박노준의 뜨거운 인기를 의식해서였는지 불필요한 슬라이딩이라는 비판 자체가 없었지만, 실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슬라이딩이었습니다. 박노준은 경기도중에 실려나갔고, 저녁 9시 뉴스에는 울음범벅이 된 여·중고생 무리가 화면에 잡혔습니다. 박노준의 병실은 꽃다발이 넘쳐났습니다. 지금은 고교야구 결승전 승자도 9시뉴스 헤드라인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당시는 당연지사였습니다.

     

    박노준은 아마시절에는 투타겸업, 그리고 호타준족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러나 구속이 그리 빠르지 않은 데다가 대학시절에도 혹사가 이어져서 프로에 와서도 투타겸업을 선언했지만, 그 결과는 저조했습니다. 타격도 컨택에 집중하는 타법이기에, 홈런 개수도 많지는 않았습니다. 타율도 그럭저럭인 수준이었습니다. 고교야구에서는 천재로 불렸던 박노준이었지만, 구속도 빠르지 않고 알루미늄배트 효과를 누리기 어려운 프로에서는 투타 모두 빛이 나기 어려운 것은 필연적이었습니다. 고교야구의 스타는 만화영화의 주인공처럼 인기를 누렸습니다. 연예전문잡지에 고교야구스타가 등장하는 것이 기본인 시대에서 박노준은 원없이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제 그 시절 고교야구의 인기는 추억의 한 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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