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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의 자존심, 그리고 박경득>
    7080 배우/7080 남자배우 2024. 8. 3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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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에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명함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얼굴 자체가 명함인 명사 중의 명사인 이건희 회장이라면 굳이 명함이 필요가 없을 법한데, 명함이 실재했다는 것에 많은 시민이 놀랐습니다. 이건희 회장을 아무나 만날 수 없기에, 게다가 아무에게나 명함을 주는 지위도 아니기에, 오랜 세월 동안 명함의 존재 자체를 세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예인들도 얼굴 그 자체가 명함이기는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경우처럼 명함은 있을 법합니다. 실제로 연예인 중에서 명함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예인의 명함 중에서 배우의 명함은 대동소이합니다. 물론 보통의 명함과는 다릅니다. 대부분 자신이 대표적 배역을 찍은 사진에 연락처를 적습니다. 가령, ‘얄개 이승현의 경우에는 얄개 시리즈에서 상대역으로 나온 강주희와의 익살스러운 사진 하단에 연락처를 적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경우에는 아예 연락처도 적지 않고 영문으로 이름과 ‘Chairman’이라는 직함만을 새긴 것과는 또 다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경득의 명함은, 비록 세월이 꽤나 흘렀건만, 특이하게 앞면과 뒷면이 달라서 아직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전면에는 사극에서 본인의 배역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고, 후면에는 천주교 세례명이 인쇄된 명함이었습니다. 박경득은 비즈니스 문제로, 정확히는 방송국 외주제작사의 출연료 체불에 대한 법적 장치의 고안이라는 문제로 만났습니다. 그가 방송연기자노조의 초대 노조위원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즈니스 문제도 문제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박경득의 멋진 모습에 대화를 하면서도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배우는 그냥 배우가 아니라는 확신을 팍팍 받았습니다. 주로 사극에서 장군이나 정승, 판서 등 고위직 배역을 맡을 수밖에 없는 강한 인상과 단호한 어조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로도 그는 평생 카리스마 넘치는 강한 인상의 고위직을 주로 맡았습니다. 그러나 더 인상적인 것은 배우의 자존심이라는 그의 배우에 대한 철학과 배우의 상()이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평생 조연만을 해왔던 그의 조역에 대한 솔직한 애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조연 배우들은 필연적으로 주연 배우들과 제스처는 물론 대사를 주고받기 마련입니다. 실연 이전에 리허설도 합니다. 자신의 배역의 대사를 외우려면 자연스럽게 주연 배우들의 대사도 외우게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절대다수의 조연 배우들은 비록 조연의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집에서 연기 연습을 하면서 주연 배우의 역할을 하고 대사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현실은 조연이지만, 마음 속에서는 주연이 된다는 것입니다. 배우로서의 숙명은 주연을 맡고 싶다는 갈망으로 발산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습니다. 물론 조연 전문 배우들 중에서 이런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배우의 자존심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심지어 단역 배우들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박경득은 프로야구 선수들 중에서 비록 후보지만 주전으로 뛰는 것을 상상하는 것과 똑같다는 비유로 쉽게 설명하였습니다. 대중과 언론의 뜨거운 조명을 받는 것이 숙명인 프로스포츠 선수와 배우는 바로 이 점에서 유사합니다. 내일은 주전(주연)이라는 희망으로 후보(조연이나 단역)를 감내하는 숙명은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전으로 뛰는 선수나 주연으로 출연하는 배우가 되려면 자질이 남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왜 배우를 하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배우 자체가 마약과 같은 속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관객) 앞에서 다른 사람(배역)으로 분하여 그의 인생을 펼치고 박수를 받는 것은 형언하기 어려운 쾌감이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배우라는 직업은 배우뽕이 들어가는 직업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래서 배우의 길에 들어서면 그 맛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나마 자신과 같은 조연 전문배우는 감내할 수 있는데, 주연 배우로 활동하다가 조연이나 다역으로 내려간 배우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을 겪는 것도 일종의 배우뽕이라는 설명도 부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주연 배우와 조연, 그리고 단역 배우의 출연료의 어마어마한 차이도 그 상실감의 원인이라는 현실적인 설명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연, 단역 배우들이 출연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무대를 떠나지 못하는 것도 그의 설명에 따르자면 배우뽕인 셈입니다. 드라마의 경우에는 과거 전속탤런트제도 시절부터 출연료등급제가 존재하지만, 영화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연기 자체는 조연이나 단역이 더 출중함에도 지명도와 인기도의 차이에 따라 대우가 천차만별인 사정이 예나 지금이나 배우업계의 냉정한 현실입니다.

     

    그는 배고픈 연극배우부터 시작한 배우였습니다. 누구보다 배고픔을 잘 아는 분이었습니다. 투잡과 쓰리잡은 그 옛날 1950년대부터 존재했던 전통(?)이라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전했습니다. 자신이 연예인노조의 초대 노조위원장으로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이 배우의 생활고라는 점을 담담히 설명하였고, 방송사의 외주제작시스템으로 인하여 외주제작사의 고질적인 출연료체불의 아픔도 담담히 설명하였습니다. 화려한 무대 뒤 배우들의 실제 삶의 고단함은 겪어보지 못하면 알 수 없다는 설명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이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은 배우의 자존심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말하는 내내 그는 배우가 천직이 분이라는 확신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의 강단진 어투가 생생합니다.

     

    하늘에서도 박경득 선생님은 연기연습을 하고 계실 듯합니다. 여기에 적어 배우의 자존심에 대하여 생각할 계기를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거듭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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