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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동원 1984>
    7080 인물 2020. 5. 2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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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에 ‘설명이 필요 없는’이라는 뜻의 ‘beyond description'이라는 것이 있다. 최동원은 그야말로 설명이 필요 없는 레전드 중의 레전드다. 최동원은 경남중, 경남고, 연세대, 아마롯데를 거치면서 무수히 많은 레전드를 만들었기에, 보는 사람마다 최동원을 기억하는 레전드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레전드는 단연 ’1984 한국시리즈‘다.

    ‘1984 한국시리즈’는 출발부터 무수히 많은 논란이 있었다. ‘야구냐, 야바위냐’하는 당시 신문기사의 제목이 논란의 정도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잔치는 시작해야 했다. 문제는 당시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였다. 당시 강병철 감독은,

    ‘투수가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1, 3, 5, 7차전을 최동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현대 프로야구에서는 저런 막장 운영을 하지 않는다. 10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한 투수가 4승과 1패를 했던 월드시리즈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프로야구 선수 구성을 보면, 강병철 감독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최동원의 동료들이 최동원의 무리한 등판을 원했다. 다음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그라운드의 신사’로 불리는 김용희 전 SK감독이 한 말이 인상적이다. ‘최동원이 워낙 강한 투수였다.’라는 말은 최동원이 아니면 이기기 어렵고, 무리한 등판이 사실상 필요하다는 말을 완곡하게 한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9ZvNVVftaeo

     

    투수 등판의 궁극적인 책임은 감독에게 있다. 그러나 이심전심 당시 선수들은 ‘최동원과 난장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최동원 1인이 고군분투하는 상황을 수용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실은 우승이 목마른 그들은 최동원 혹사의 방조범이라고 해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최동원은 1984 한국시리즈 우승의 견인차가 되었다. 그러나 학창시절부터 누적된 혹사는 이미 최동원의 팔을 망가뜨렸다. 최동원의 팔은 무쇠팔이라 불렸지만 사람의 팔이 무쇠팔일수가 없다. 그렇게 최동원은 불꽃처럼 스러져갔다. 최동원의 혹사는 최동원의 영광인 동시에 한국야구의 흑역사다. 이제 더 이상 투혼이라는 이름으로 혹사를 미화해서는 아니 된다. 최동원은 그 자체가 위대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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