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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일성 vs. 허구연>
    7080 이야기거리 2023. 9. 9.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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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제는 똥도 좋다!

     

    1970년대를 살았던 사람은 이 멘트를 기억합니다. 당시 일제와 더불어 미제 물건은 뭐든지 우수한 품질이기에 생긴 말이었습니다. 똥도 미제라면 좋다는 말이 서민의 의식을 지배할 정도였습니다. 제 고향 대전에도, 정확히는 지금은 대덕구인 당시 대덕군 장동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미제 물건은 요즘 말로 넘사벽의 품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미제 물건을 구해서 일반 시민에게 파는 미제장수가 자연스럽게 생겼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도 미제아줌마라 불리는 미제장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요즘에는 이런 분들이 없습니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미제 과자는 단순한 포장에 화려한 장식은 없었지만 맛이 좋았습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것은 미제 학용품이었는데, 투박하지만 튼튼하고 품질이 좋았습니다. 일제 학용품이 뭔가 깜찍하고 세련된 것하고는 다른 맛으로, 미제 학용품은 국산 학용품과는 수준 차이가 꽤나 많이 났습니다. 그렇게 제 어린 시절의 미국에 대한 인상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미제 학용품보다 더 눈길이 갔던 것은 당시 미국방송이라 불린 AFKN방송이었습니다. 당시 대전에서 볼 수 없고 오로지 수도권에서만 볼 수 있었던 ‘600만불의 사나이’, ‘원더우먼’, ‘헐크등의 외화를 더빙이 아닌 원어로 볼 수 있었고, ‘톰과 제리’, ‘뽀빠이등의 만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종일방송을 해서 심심풀이로 딱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습니다. 당시 저는 영어단어를 외우고 수학문제 풀이에 머리가 아픈 까까머리 학생이었는데, 삽시간에 프로야구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하일성과 허구연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이 프로야구중계에서였습니다. 동네야구, 고교야구와는 색다른 프로야구가 그렇게나 멋이 있었습니다. 이호헌이라는 당시에도 원로급의 해설위원과 목소리가 정감어린 김소식도 있었지만, 둘의 중계가 대세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방송은 피드백이 빛의 속도로 빠른 분야입니다. 시청자의 반응이 미지근하거나 출연자가 큰 실수를 하면 빛의 속도로 교체되는 것이 당연한 분야가 방송입니다. 하일성과 허구연 두 분이 수십 년을 해설로 군림한 것은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일성은 구수한 입담으로 복잡한 야구용어에 얽매이지 않고 편안하게 이웃집 아재처럼 만담조로 설명을 하였기에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이에 반하여 허구연은 요즘 말로 자뻑이 무척이나 거북했습니다. 영어로 뭔가를 설명하려는데, ‘잘난 체한다는 인상이 짙어서 꺼려졌습니다. 당시에는 운동선수는 공부를 전폐하고 운동만 했습니다. 그래서 운동선수 출신은 무식하고 투박하다는 선입견이 사회전반에 깔렸기에, 허구연 특유의 잘난 체하는 해설이 거북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하일성은 입담이 좋아서 연예프로그램에 단골로 출연한 반면에, 허구연은 거의 출연이 없었습니다.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하일성이 허구연보다 한 끗위라는 것이 당시의 평판이었습니다.

     

    허구연은 당시에 유달리 일본식 영어를 비판했습니다. ‘포볼(four balls)’베이스 온 볼스(base on balls)’, ‘데드볼(dead ball)’힛 바이 피치트 볼(hit by pitched balls)’, 그리고 온 더 베이스(on the base)’태그업(tag up)’이 맞다고 강조했습니다. 당시에는 동네야구에서도 일본식 영어, 일명 재플리시로 통용되던 야구용어가 일상이었습니다. 당연히 중계에서도 일본식 영어가 익숙했습니다. 안 그래도 잘난 체했던 허구연이 더욱 짜증이 났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별난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한국식 풍토입니다. 허구연은 급기야 저에게는 비호감 그 자체로 변했습니다.

     

    아무튼 당시 프로야구의 출범 이후 중독수준으로 프로야구에 빠졌던 저는 문득 AFKN에서도 미국야구(MLB)가 중계된다는 사실이 떠올라서 유심히 MLB중계를 봤습니다. 일본식 영어가 아닌 정통 영어로 야구용어가 등장하는 것이 무척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변화구를 통칭해서 ‘breaking ball’이라 부르는 것도 확인했지만, 무엇보다도 허구연이 설명한 내용이 모두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호헌이 당연히 앤드런이라 부르던 것을 미국 캐스터와 해설자는 ‘hit and run’이라 정확하게 부르는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일성이 포볼로 부르는 것을 미국에서는 ‘walk’ 또는 ‘base on balls’라고 부르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밖에 하일성이 자신있게 부르던 야구용어 전부가 일본식 영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이후 잘난 체해서 짜증이 났던 허구연이 실제로는 영어에 능통해서 미국 현지에서 감독이나 코치, 선수는 물론 구단 관계자와 프리토킹을 하는 장면을 우연히 보고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운동선수는 무식하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저 스스로를 반성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허구연은 그 이후에도 세이버매트릭스에 정통한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세이버지수라고도 줄여서 말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wrc+입니다. 이것은 Weighted Runs Created의 약자로, 조정득점창출지수입니다. 단타나 홈런이나 모두 안타로 표시되는 타율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고안된 지수인데, 야구는 궁극적으로는 득점경기이고 안타는 득점획득을 위한 수단으로서 안타의 질적 차이를 반영하여야 한다는 요청에서 고안된 세이버지수입니다.

     

    2,000년 이후 미국야구에서 본격적으로 도입이 되어 국내 열성팬들을 중심으로 뜨겁게 논의된 것이 세이버지수입니다. 놀랍게도 허구연은 세이버를 늦은 나이에 연구한 것입니다. 반면에 하일성은 변함이 없이 만담해설을 이어가서 열성팬들을 실망시켰습니다. 시대가 변하면 해설위원의 자세도 변해야 하는데, 그 오랜 세월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아 해설시장에서 허구연은 생존했음에도 하일성은 도태된 것입니다. 허구연은 시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을 한 반면에, 하일성은 구태의연했습니다. 철옹성 같던 해설위원의 자리에서 하일성은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야구 규칙은 그 어떤 스포츠 규칙보다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초창기 그 어렵고 복잡한 규칙을 쉽게 다정한 이웃집 아재의 목소리로 설명했던 것이 하일성입니다. 프로야구 중흥에서 하일성의 지분은 꽤나 큽니다. 그러나 인터넷시대가 도래하고 본토야구를 직접 접한 청년들의 유입은 당연히 새로운 요구를 담기 마련입니다. 그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하일성은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 변화의 요구를 담아야 하는데, 하일성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허구연이 KBO총재로 등극한 것과 대조적으로 하일성은 자신의 비극 훨씬 이전부터 그는 해설시장에서 도태되었습니다. 수십 년간 하일성을 좋아했던 저로서는 그저 황망하기만 했습니다. 이제 프로야구 해설위원들도 뜨거운 경쟁이 도입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원리는 해설시장에서도 엄격하게 적용되는 세상입니다. 하일성과 허구연의 인생사는 준엄한 교훈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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