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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뜰 날’과 함께 뜬 송대관의 가요인생>
    7080 가수/7080 남자가수 2021. 1. 9.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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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요가 뜨려면 가수가 뜨거나 가요 자체가 떠야하지만, 사회적 분위기 내지 시류에 부합하여야 합니다. 혹자는 이것을 시대적 배경과 맞아야 한다거나 운때가 맞아야 한다고도 합니다. 가요 자체가 유행을 타기에 과거에 묻혔던 곡이 부활을 하거나 예전에 히트했던 곡이 다시 히트하는 것도 유사한 현상입니다.

     

    팝 역사상 최고의 명곡인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악명이 높았던 검열이 횡행했던 한국에서는 노래가사 때문에 금지곡이 되었던 수모를 겪었습니다. 만약에 검열이 없었고 이 노래의 발표시기인 과거 7~80년대처럼 팝송이 맹위를 떨치는 시대라면 당연히 한국에서도 메가히트를 했을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도 있지만, 21세기 현재라면 대박은 아니고 중박정도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중고생이 빌보드차트 순위를 좔좔 읊어대던 과거 7~80년대와는 차원이 다른 세상입니다.

     

    1976년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밤이고 낮이고 길거리에서나 다방에서나 TV나 라디오에서나 하루종일 송대관의 해뜰 날이 울리던 시절을 기억할 것입니다. 당시 해뜰 날의 광풍은 엄청났습니다. 리듬이 비교적 단순해서 따라부르기도 좋았고, 가사도 만년 서민풍의 가수 송대관의 이미지와 가수가 완벽하게 매치되어 가요 히트의 법칙을 모두 따른 곡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완벽하게 일치하기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48MZ8U6gto

     

    그 당시는 청소차가 움직이면서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래가 전국을 휘감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이 새마을 노래는 일본군가풍의 노래라는 시비에 휘말려 이제는 아예 잊혀진 곡이 되었습니다만, 당시에는 그 어느 유행가 못지 않게 히트(?)한 곡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는 잘살아보세라는 곡과 더불어 새마을 노래가 전국을 강타했던 시기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 휘호로 하면 된다또는 새마을 정신이라는 글귀가 담긴 액자나 현판이 전국 방방곡곡에 걸렸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도 박정희 대통령이 이 노래를 자신의 정치모토와 부합하기에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합니다. 시대적 분위기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노래가 송대관의 해뜰 날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는 의외로 예인기질이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탄압도 했지만, 대중문화의 중흥에 기여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작곡이나 연주도 가능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글씨만 명필이 아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송대관의 해뜰 날이 화끈하게 떴던 이유는 노래를 부른 송대관의 진정이 그대로 녹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오로지 출세만을 바라보고 무작정 상경을 해서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겪은 인생역정이 담긴 가사가 오롯이 해뜰 날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국민들은 가난을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뜨거웠습니다. 고도성장기였기에 노력하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충만한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보다 훨씬 잘사는 21세기 현재 부동산의 폭등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결혼률과 출산률이 곤두박질하는 것과 대조적인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신혼은 단칸방에서 하는 것을 그다지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송대관의 인상을 유심히 보면 전형적인 서민대중가수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송대관은 고급스럽다거나 이지적인 인상이 아닙니다. 실은 그런 인상이었다면 해뜰 날도 그렇게 뜰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가요계에서 해뜰 날은 기념비적인 히트를 했습니다. 대중가요로 노래비가 세워지는 것은 가수에게는 크나 큰 영광입니다. ‘해뜰 날의 노래비는 송대관의 고향에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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