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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향사람 신승훈>
    7080 이야기거리 2021. 1. 3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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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

     

    사람의 수명은 수십 년입니다. 그러나 그 수십 년의 세월에서 영영 잊을 수 없는 해가 있기 마련입니다. 신승훈에게는 1990년은 잊을 수 없는 한해입니다. 저에게도 그해는 잊을 수 없는 한해입니다. 물론 신승훈은 저를 모르지만, 저는 신승훈의 다이나믹한 변신과정을 우연히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단지 고향사람이라는 이유로!

     

    1990년에 신승훈은 무작정 상경을 하여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미소속에 비친 그대라는 앨범을 내게 됩니다. 신승훈은 앨범을 내기 전에는 충남대 경영학과를 다녔던 평범한 학생이자 호프집 등에서 통기타를 치면서 가수의 꿈을 키우는 무명가수이기도 했습니다. 신승훈을 알게 된 것은 대전의 나사호프라는 호프집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PJCwPtj-18

     

    당시의 나사호프는 나름 서양의 오페라극장 비스므레 했습니다. 층과 층을 턴 후에 그 공간사이를 무대로 만들었고, 바로 그 무대에서 통기타가수 등을 불러서 라이브공연을 했습니다. 물론 바로 그 무대에서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던 가수가 신승훈이었습니다. 당시 신승훈은 장발에 검정색 뿔테를 걸친 평범한 외모였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저는 20대의 혈기왕성한 시절이라 호프집을 자주 가서 생맥주를 마시던 시기였는데, 마침 방위복무를 앞둔 시기였는지라 나사호프의 단골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승훈의 라이브공연을 자주 보았습니다.

     

    언젠가 기사에서 신승훈이 Vincent를 레파토리로 두고 자주 불렀다는 것을 봤는데, 제가 본 것은 고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도 그 항목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통기타를 반주로 노래를 불러서 그랬는지 당시 인기가 있었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등등의 노래를 자주 불렀습니다. 이태원의 솔개를 불렀던 기억도 납니다. 고 함중아가 야간업소의 동료였던 조용필이 일본노래를 자주 부르면서 자기의 노래를 담은 앨범을 내기를 그렇게나 간절히 원했다던데, 아마도 무명가수시절인 신승훈도 그랬으리라 봅니다.

     

    아무튼 1990. 5. 7. 저는 방위복무를 시작하면서 퇴근 후 아니면 주말에 나사호프를 들렀는데, 여전히 신승훈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당시 제 친구가 충남대 경영학과를 다녔는데, 신승훈이 교내 음악동아리에서 보컬을 했으며, 나름 가수라 불릴 정도로 음악에 소질이 있다고 칭송에 목청을 높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방은 자연재해나 대형사고가 아니면 9시 뉴스에서 등장하기도 어렵고, 지방에서 날던 가수가 서울에서 뜨는 것은 정말로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냥 신승훈이라는 무명가수에 대해서는 무관심 그 자체였습니다. ‘나사호프집에서 오다가다 부딪히기도 여러 번이었고 신청곡도 잘 받아주었던 바로 그 신승훈이었지만, 그가 한국 가요계에서 기린아도 등극할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가을이 되면서 신승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서빙을 하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가수데뷔를 위하여 상경을 했다는 귀뜸을 하였습니다. 솔직히 저는 신승훈이 뜰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외모가 평범 그 자체였고, 목소리가 미성인 점 외에 눈에 띄는 개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통기타가수는 이미 70년대에 만개를 하여 시대에 뒤쳐진 것이라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신승훈을 아예 잊고 살았는데, 우연히 TV에서 신승훈을 보았습니다. ‘나사호프에서 통기타를 치던 그 신승훈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을 했습니다.

     

    80년대 내내 남자들의 머리스타일은 장발이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는 깔끔한 단발의 시대로 변신을 했습니다. 805월의 광주부터 데모를 하던 학생들의 머리, 그리고 청년들의 머리를 대한뉴스 등 뉴스아카이브를 보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요계가 90년대에 들어와서 화끈한 변신을 한 것이 더욱 큽니다. 80년대는 기존의 트로트 댄스나 트로트 발라드를 벗어나지 못한 시기였지만, 90년대는 정통 발라드 곡이 번창한 시기였습니다.

     

    노래 자체의 변신도 화끈했지만, 반주도 충격적인 그러나 신선한 변신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80년대까지는 밤무대의 저렴한 무대틱한 반주를 담은 가요도 제법 있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는 조용필이 미국의 세션맨을 고용하여 을 취입하는 등 반주에서도 혁명적인 변화를 담았습니다. 한 마디로 가요계의 질적 도약이 90년대에 본격화하였습니다. 1992년 뉴키즈 온더 블록이 내한공연을 하였을 때, 집단압사라는 비극이 발생할 정도로 국내에서는 팝의 인기가 여전히 뜨거웠습니다만, 차츰 국내가요의 질적 성장이 본격화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신승훈의 대박성공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당시 90년대 중고생들이 80년대 중고생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빌보드 차트를 줄줄 외우던 80년대 중고생들과는 달리 국내 가요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입니다. 달리 말하면, 국내 가요가 질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다는 점입니다. 콧소리를 섞으면서 트로트 발라드를 불렀던 김범룡이 바로 몇 년 전에 히트를 했건만, 이미 90년 전후부터 그런 트로트 발라드는 잊혀지고 있었습니다. 신승훈은 정갈한 발라드로 가요계의 변화를 주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소 속에 비친 그대는 실은 미약한 곡입니다. 여성취향의 발라드곡으로 인상적인 데뷔 정도로만 그칠 수도 있었습니다. 원 히트 원더를 넘어야만 가요계에서는 먹어주는가수가 됩니다. ‘보이지 않는 사랑은 신승훈 신화를 만개한 대역작이었습니다. 클래식곡을 삽입하고, 반주곡으로 클래식 악단을 활용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띄운 보이지 않는 사랑은 대박을 넘어 초대박을 쳤습니다. 마치 퀸이 보헤미안 랩소디를 만들었을 때의 광풍과 비스므레했습니다. 가요차트 정상을 무려 14주나 했습니다. 라디오나 길거리에서 온통 보이지 않는 사랑이 흘렀습니다. 거의 공해수준으로 들렸습니다.

     

    1990년의 봄에 신승훈을 알았는데, 몇 달 사이에 신승훈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신승훈은 발라드의 레전드입니다. 미국에서도 시골 카운티출신의 유명인사를 두고 고향사람들은 영웅으로 자랑스러워합니다. 유명연예인, MLBNBA스타 등이 되면 마치 자기의 일인 양 자랑스러워하고, 고향 학교에다 동상이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보통입니다. 고향 대전출신의 신승훈은 동향인을 넘어 한국 가요계의 레전드가 되었기에, 저는 그냥 신승훈이 뿌듯합니다. 제 친구, 선후배 중에는 국회의원, 대법관, 법원장, 검사장, 장관 등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승훈이 제일 난 사람으로 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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